인산 김일훈 선생
활인구세의 80년! 병들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인산 김일훈 선생은 1909년 기유년 조선 순종 3년 음력 3월 25일 밤 10시쯤 부친 언양김씨 김경삼과 모친 강릉 유씨 사이의 7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함경남도 홍원군 용운면 연흥리,
구름 속에서 용이 품안으로 날아드는 태몽이 있어, 구름 운(雲)자, 용 용(龍)자 '운룡'이라 이름 지었으며, 그 이름을 해방 직후까지 쓰게 된다. 본명은 김철진(金哲鎭), 맏형은 두꺼비집을 발명한 김봉진(金鳳鎭)이다.
예전의 세상에 온 뭇성인들이 그러하듯 선생 또한 유년시절 남달리 총명할뿐더러 예지력을 발휘해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선생은 네 살 무렵 이미 한글을 떼고, 한글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창제되었음을 간파하였다고 한다. 한글을 터득한 데 이어 옥편을 떼고 한문본 삼국지, 당시, 두시, 강희자전 등을 차례로 독파하는 믿기지 않는 총명함을 보였다.
세상에 둘도 없는 선생의 특출난 의술은 생이지지(生而知之), 곧 타고난 것이었다. 선생은 말과 글을 알면서부터 우주만물의 이치를 꿰뚫고 질병의 유무와 치료약물에 대한 예지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일곱 살 때 비가 개인 하늘의 오색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약리작용을 활연대오한 선생은 공간 색소 중의 약분자 합성방법을 모색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부터 병명도 모른채 숨져가는 이웃의 환자들을 구료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절,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동해산 마른명태 다섯마리를 고아 먹여 낫게 한 것이나 폐암 환자를 수백마리의 땅벌에 쏘이게 하여 치료한 사례 등은 천문지리의 원리를 꿰뚫은 선생의 직관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선생은 아홉 살 때 한반도에 전래되어온 소금 제조법을 보완, 소금을 대통 속에 다져 넣고 송진 관솔 등을 이용해 강한 화력으로 아홉 번을 구워야 제대로 법제된 소금을 만들 수 있다는 견해를 조부께 피력하기도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왜 소금을 구워서 사용해야 하는지, 왜 대통이나 송진 등을 사용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다만 습관적으로 그렇게 해왔을 따름이었다. 오늘날 세상에 널리 알려져 유통되는 죽염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열여섯 살 때인 1924년에는 의주에서 횡포를 일삼던 일본인 청년들을 제압한 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선생은 항일운동의 영웅 변창호 선생이 이끌던 모화산 부대에 들어가 항일전투에 참여하였고, 이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 묘향산 등지를 떠돌면서 병자를 구료한다. 오지(奧地)를 전전하던 이 시절의 선생은 탄광 광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진폐증을 탕약과 쑥뜸요법을 병행하여 완치케 하였으며, 죽염제조 실험을 거듭하여 성공한다.
송만공, 김수월, 하동산, 방한암 스님들과 교유
스물여섯 살 때인 1934년 봄철 어느 날, 철원경찰서 습격 사건의 주동자인 모화산 부대 대장 변창호 선생을 만나러 철원으로 가던 도중 일제의 앞잡이 형사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한다.
여러달 계속된 모진 고문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복역 1년 6개월째 되던 어느날, 형무소를 탈출하여 묘향산으로 들어가 선생 자신이 창안한 인산쑥뜸법, 곧 영구법(靈灸法)으로 병을 치료해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때 함께 고문받았던 동지들 중 쑥뜸을 뜨지 않았던 이들은 고문 휴유증으로 대부분 생명을 잃는다. 묘향산에 들어간 선생은 당대의 걸출한 선지식이었던 송만공, 김수월, 하동산, 방한암 스님들과 교유한다.
서른 다섯 살 때인 1943년 장영옥 여사와 혼인한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당시 은신해 있던 의주 천마산 영덕사에서 하산하여 서울로 와 여운형, 방주혁, 김규식, 백성욱, 이명룡, 최영호, 백운계, 송진우, 김성수, 김범부, 정인보, 장덕수, 김준연, 조병옥 선생들과 국사를 의론한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양한방종합병원과 동서의과대학 설립을 제안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50년에는 당시 내무장관이던 백성욱 박사를 통해 대통령께 전쟁 발발에 대한 예언을 하며 대책수립을 건의하였으나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처럼 정권이 무조건 미국만을 추종하는 사대주의로 기우는 한편 개인독재로 치닫고, 세상에 대한 자신의 제안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자 희망을 포기하고 세속을 떠나 입산한다.
1950년부터 선생은 충남 공주 마곡사 부근, 계룡산 감나무골, 계룡산 용화사 부근, 전북 남원과 운봉 마을 등지에서 머물다 1957년 함양으로 건너온다.
함양읍내에 잠깐 기거하다 삼봉산 살구쟁이 마을(杏亭洞)에 인산초당을 짓고 함지박을 깎으며 생계를 이어간다. 숨어살아도 명성은 드러나 서울과 각처에서 학생들이 몰려와 선생의 신약과 역철학 등을 강의받았다. 어느 곳이든 선생이 머물던 곳에는 기적같은 구료의 신화가 계속된다. 이 시절까지 선생은 환자 구료의 중요한 수단으로 침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함양으로 낙향하기 직전인 1980년에 선생 최초의 저술인 '우주와 신약'을 펴낸 데 이어, 1981년에는 '우주와 신약'을 한글화한 '구세신방'을 연이어 출간하여 자신의 의론을 세상에 공개하기 시작한다.
1981년 12월 31일 함양읍으로 낙향하여 운림초당에 거처하던 선생은 78세때인 1986년 우리나라 현대의학 사상 불멸의 대저술로 손꼽히는 '신약'을 드디어 세상에 내놓는다. 그리고는 곧바로 노구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공개강연회를 갖는다.
1986년 신약협회 초대회장, 1987년 민속신약연구회를 발족시키고, 곧이어 인산의학 최초의 정기간행물인 '민의약'을 발간한다. '신약'의 출간으로 선생의 독창적 의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선생이 머물던 함양 읍내 상동마을과 이곳 함양읍의 삼남댁 신약당과 삼봉산 인산농장 일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그야말로 구름처럼 몰려든다.
78세 때인 1986년 6월 20일 한국일보 대강당에서 시작, 83세 때인 1990년까지 도합 22차례의 공개강연회를 통해 공해독 시대의 건강법을 제시한다.
84세 때인 1992년 임신년 음력 3월 3일, 가족들을 모이게 한 뒤 '세상에 남기고 가는 말'을 녹음토록 한다. " 인업을 중시함이 부국의 지름길 " 이라는 요지의 이 말씀은 유언이 되었으며, 그 녹음한 전문이 시사춘추 92년 4월호에 수록되었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가난하고 병든이들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충정, 세상 사람들에 대한 효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선생은, 1989년부터 1992년초까지 삼남댁인 신약당에서 거처하며 사리장을 최후로 개발하고 밤낮 밀려드는 환자들을 구제하다가 과로로 인해 1992년 5월 19일(음력 4월 17일) 오후 11시 25분 향년 84세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하고 선계로 떠났다. 선생이 가신 뒤 생전에 환자들을 맞아주던 삼봉산 인산동천 산등성이에 법구를 안장하였다.
1993년 이후로 신약당에 설립된 출판사(현재 인산출판사)에서 선생의 어록과 원고 등을 정리하여 '신의암처방집'(민간요법,대체의학의 바이블이 되었다) '신의원초' '의사여래' '의약신성' '활인구세' '신약본초3'을 엮어냈다. 1992년 신약협회 2대회장 삼남 김윤수가 선생 서거 10주년을 맞이하여 2002년 사단법인 인산학연구원을 세우고 인산한의원, 인산한방암센터를 부설하여 인산의학과 한방암치료법을 널리 펴고 있다.